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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풍경

정치·북한

by 김정우 기자 2016. 4. 2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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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일간지들은 대부분 '오보 아닌 오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1당이 뒤바뀐 '역사적 사건'을 선거 바로 다음날 1면 톱 제목은커녕 기사 본문에서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판갈이' 시점을 최대한 늦춰도 새벽 5시까지 최소 26표차 승부를 벌이는 개표전쟁을 담아내기엔 무리다.


TV나 인터넷으로 실시간 개표 상황을 볼 수도 있지만, 과도하게 쏟아지는 난잡한 속보 대신 정제된 '정보'를 원하는 이들 상당수는 지금도 아침에 '지면'부터 찾는다. 아침에 신문 탁 펼쳐들고 '종합' 선거결과와 분석을 한눈에 보고 싶다는 거다. 성향이 서로 다른 신문들이 어떤 제목으로 선거를 '결론'짓는지도 볼거리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 시스템으론 완전한 개표 결과와 종합·비교·분석·정리는 선거 이틀 후 조간에서 볼 수 있다. 14일자 신문 분석을 다시 보자. 모두 새벽 '○○시 기준'의 미완성 분석들 뿐이다. (일부 신문은 어설프게나마 최종 인터넷판으로 지면을 덮어놓긴 했다)


슈퍼컴퓨터 1200대를 연결하면 현존 바둑 최고수도 이길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수명이 2시간 정도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허구한 날 틀리는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기준으로 선거 승패를 '임시적으로' 가늠하고 갈음해버린다. 당직자들이 한꺼번에 환호하거나 침통해하는 사진과 영상 대다수는 최종 개표 결과가 아닌 오후 6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본 시점이다.


'불확실한 결과'를 기준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셈인데, 그마저도 개표에 가속이 붙으면 출구조사 약발은 금새 떨어진다. 전국 253곳의 개표소에서 5만9000여명의 인력과 1500여대의 분류기가 쉴틈없이 표를 나누고, 국내 주요 방송은 저마다 화려한 그래픽을 내세워 이를 거의 실시간으로 전한다.


총선은 대선과 다르다. 257석의 링 위에서 동시다발적인 승부가 벌어진다. "51.6% 대 48.0%" 이런 식으로 단순명확한 결과가 나오는 대선과는 보도 스타일부터 달라야 한다. 방송사들은 후보들 사진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합성해 저마다 눈에 띠는 그래픽으로 경쟁을 벌인다. (그런데 정작 상당수 국민은 후보자들 얼굴을 모른다. 뭔가 화려한 게임이 벌어지는데,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누리당이 좀더 많이 지고 더불어민주당이 좀더 많이 이기는 듯한 과정을 볼 뿐이다. 그마저도 국민 대부분은 별 관심이 없다.)


이번 선거의 판세는 대충 새벽 1시쯤 이후 윤곽이 드러났다. 투표 종료 후 최소 7시간 이상이 걸린 셈이다. 누군가는 짜릿하고 잔인한 역전의 드라마를 즐기고, 상당수 방송사들은 생각보다 높진 않지만 타사보다 조금 더 많이 나온 시청률을 유지하기 위해 로봇과 드론까지 동원하는 '파격'을 보인다. 그런데 뭔가 결판나는 걸 보려면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투표지분류기를 이용한 개표. ⓒ중앙선관위


방법이 없지는 않다. 바로 전자투표다. 그러나 한국인 상당수는 '전자투표'란 말에 거부감부터 느낀다. '조작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고 하는 유전적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렇다. 현재 개표 시스템에서도 '조작 가능성'이 높다며 의혹이 수시로 제기되는데, '전자 투표'를 말하는 순간 그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 된다.


하지만 이미 개표는 '전자식'이 도입된 지 꽤 오래다. 수집된 투표용지를 전자개표기에 넣으면 스캔을 통해 표가 분류되고, 각 후보별로 분류된 투표용지의 수를 계수기로 헤아려 개표 결과를 내놓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100표차 이내의 초접전이 벌어지면 후보들은 전면 수개표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개표의 '스캔' 개념을 투표에까지 적용하면 전자투표가 된다. 흔히 전자투표라고 하면 스크린에 터치만 하면 끝난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투표란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실존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방식이 되든 '표기된 종이'가 반드시 등장하게 된다. 최근 관심이 쏠리는 방식은 유권자가 똑같이 투표는 하되 종이를 펼쳐 넣어 투표함에서 곧바로 스캔이 이뤄지게 하는 식이다.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광학판독 기술을 이용한 투개표 시스템을 이미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스탄에 수출까지 했다. 중앙아시아의 상당수 국가는 기계보다 사람이 하는 개표에 부정과 조작이 더욱 많아 선거 때마다 홍역을 치러왔다. 하지만 키르기스스탄 선관위는 한국 측이 설치해준 3669대의 자동 개표기로 선거 당일 개표 속보를 내고 11일 후 최종 개표 결과와 일치함을 확인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키르기스스탄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모범적·효율적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로 평가했다.


만약 광학 판독 기술을 한국 선거에 도입할 경우, 유권자는 원래 하던 대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되 용지를 접지 않고 편 채로 투표함에 넣으면 된다. 투표소에서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표를 넣는 동시에 스캔이 되고, 이 결과는 한꺼번에 합산이 가능하다. 투표가 끝나는 시점에서 불과 몇 분만에 전국 선거 결과 집계를 끝낼 수 있다. 뭔가 효율성이 있어 보인다.


정 반대의 주장도 있다. 전자적 수단을 활용한 개표야말로 가장 조작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투표소에서 곧바로 수개표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의 다수 국가가 개표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투표함 이동 없이 투표소에서 곧바로 수개표를 진행한다고 한다. 아일랜드의 경우 전면 수개표로 일주일 정도 지나야 최종 결과를 알 수 있다. 이는 개표의 전 과정과 결과를 유권자 누구나 별도의 전자적 전문지식 없이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앞선 것으로 보인다. 과거 국회에 발의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보면 독일·프랑스·스웨덴·스페인·네덜란드·캐나다·멕시코·덴마크·필리핀·대만·브라질 등이 집중식 개표 대신 투표소 개표를 고수한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사람 대신 기계로 개표해야 부정 의혹을 없앨 수 있고, 유럽 선진국은 기계보다 사람을 선택하는 게 더욱 신뢰성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국민성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정반대가 되는 셈이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가장 중요한 건 관리자들의 수준과 책임감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 한 지역구에서 '새누리당 100% 몰표' 사태가 발생해 선관위가 재검표를 실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분류 과정에서 담당사무원의 실수로 절차상 문제가 있었지만 "정당별 득표수 변동은 없다"고 선관위는 강조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고 했다. 군에서 실탄을 잘못 다루면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를 맞게 된다. 한국은 이번 선거에서 2443만개의 탄환을 5만9000여 명의 사람과 1500여대의 기계가 다뤘다. 아무리 우수하고 비싼 첨단기술을 동원하더라도 오류가 발생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사람이든 기계든 한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의 논의'가 가능하다.


20대 총선 기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로비에 전시된 '투표하세요' 복면가수 마네킹. ⓒ 김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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